1998년 7월 19일: 인간의 사회에서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가?
- Bugun Choi
- 2023년 12월 13일
- 12분 분량
1998년 7월 19일
인간의 사회를 위해서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가?
인류가 이루어 놓은 세계에는 정의라는 말이 존재해 왔습니다. 인간사회를 위해서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의미를 우리는 여기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정의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일들이 인간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정의가 실종된 사회가 자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정의가 빛을 보지 못하는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정의(正義)는 인간사회를 밝히는 빛이다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관찰된 바에 따르면 정의(正義)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온갖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는 부정, 부패, 사기가 만연하여 탐관 오리들의 득세했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역으로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는 부정, 부패, 사기, 탐관오리가 발붙이기 어려운 사회다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인간이 정의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대안으로도 밝은 세상은 열리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 정의는 필수 불가결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정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정의를 올바르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예가 드물었습니다.
오늘은 이 나라가 건국된지 50년만에 그리고 이 민족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지 4천 년만에 처음으로 정의에 대해서 발표하는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회를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법을 제정한다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그 사회에서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기이(奇異)한 현상을 낳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없는 사회가 얼마나 무섭고 그런 사회의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에 대한 예를 중국의 고사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깊은 산을 넘게 되었는데 인가가 없는 산 속에서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공자는 왜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여인의 사연을 알아보도록 제자를 보냈습니다. 그 제자는 여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깊은 산 속에서 혼자 구슬프게 울고 있는가?”
“작년에 호랑이가 나타나 아들을 물고 갔는데 올해에 또 그 호랑이가 나타나 남편을 물고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과 남편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왜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지 않고 이 깊은 산 속에서 살다가 그런 일을 당했느냐?”
이 질문에 여인은 뜻밖의 답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산 속에는 호랑이는 있어도 탐관오리는 없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탐관오리들이 호랑이 보다 더 무서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여러 제자들 앞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보다 더 무섭다는 가르침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정의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날 정의가 빛을 보는 나라에서는 부패나 부정을 찾아볼 수가 없고 구성원들의 질이 높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나라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정반대로 정의의 상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사회는 그 보다 더 많습니다.
밝은 대낮에 활동할 때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활동할 때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두운 곳에는 함정이 있어도 그 함정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의심을 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누군가가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 믿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를 볼 때마다 매우 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점점 잘못되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그것을 밝히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건국 50년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새롭게 나라를 세우자는 캐치프레이를 걸고 신문에는 여러 기사들이 나오고 텔레비전에서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들 거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생각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세상에는 뜻이 있고 세상의 일들은 그 뜻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그 뜻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그 뜻은 이치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또 만들어져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상의 이치를 빼놓고 자신들의 생각만을 주장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겠습니다. 만일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바로 서 있다면 누구도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대중 앞에서 주장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세상의 뜻이나 이치 속에 있는 일을 절대 거슬러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이 땅에 정의가 없다면 능력을 가진 자들은 할 일이 없습니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이 사라지게 됩니다. 옳고 그름이 사라지면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는 힘을 가진 자가 됩니다. 정의가 바로 선 곳에서의 통치자는 국민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가 사라진 사회의 통치자는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법은 진실이나 진리를 밝히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통치자의 통치수단으로 변해버립니다. 통치자는 법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무능한 자들이 권력에 붙어서 득세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정의는 인간 사회를 밝히는 것 즉 사회 속에 있는 일을 밝히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를 존속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의입니다. 그 중요한 것이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의 경우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를 없애버리면 자동차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정의는 국가사회에 큰 힘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근본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옳게 살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교육이 어떻게 제대로 될 수 있으며 기업 경영이 어떻게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있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리 유명한 대학의 학위를 받았다 해도 그 사람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있는 일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을 말입니다.
정의가 빛에 비유될 수 있다고 할 때 만약 정의가 실종되어 버리면, 어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어둠 속에서는 꿈을 꾸면서 그 속의 일들만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50년 동안 한국의 교육은 세계에서 양적으로 가장 팽창해왔다.’ 다시 말해서 학생 수를 가장 많이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가장 졸업장을 많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학생의 수를 많이 유치하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학생을 유치하고 그들에게 졸업장을 주는 과정에서 과연 가르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있는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우리들의 주장이에요.
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정의가 밥을 먹여주느냐? 진리가 밥 먹여주느냐?”
그 때 저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일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올바른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대중매체를 접하다 보면 여러 단체들이나 회사들이 도덕과 양심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일은 정의가 실종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 어떻게 양심을 아는 자가 있고, 도덕을 아는 자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도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난 절대 아는 자가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도덕을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도덕을 압니까? 이 나라 사람들이 도덕을 압니까? 항상 도덕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말은 존재하지만 도덕을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초등학교 도덕책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한산섬 앞에서 싸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도 나름 가르침은 됩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전선에 나아가서 적군을 맞이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하는 것은 큰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가르침을 통해서는 도덕을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철학이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철학자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철학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아무도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제대로 철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도덕의 경우 또한 같습니다. 도덕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사랑을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동양에서는 사랑을 도덕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도덕이라는 용어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동양 사람은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 세계가 가지고 있는 사회환경이나 가르침의 차이 때문입니다.
도덕의 한자 표기는 각각 길 도(道)와 덕 덕(德)입니다. 덕이란 무엇입니까? 올바른 행동 아닙니까?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바로 인간의 길을 만든다.’ ‘인간 사회에 큰 가르침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도덕이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세상에 좋은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라면 이 또한 축복입니다. 결국 사랑의 정의도 축복이고, 도덕의 정의도 축복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언어의 문제입니다. 영어에서는 5를 ‘five’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5를 ‘다섯’ 혹은 ‘오’라고 합니다. 용어의 차이일 뿐입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덕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존재했던 일입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일을 바로 알 수 있겠습니까? 존재하고 있는 일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일을 올바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는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인 것입니다.
법은 없어도 됩니다. 법이 없어도 정의가 존재한다다면 그 사회에는 모든 사람들이 경우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기, 부정, 부패와 같은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법이 있어도 정의가 없다면 그 사회는 부정, 부패, 탐관오리들의 득세, 사기, 거짓이 판을 치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옳은 사람이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자들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망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과거나 현재, 미래의 어떤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도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를 하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저는 몇 년 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여행했습니다. 나라들을 방문할 때마다 신문사나 방송국을 방문해서 해당 국가에서 최고로 자랑할 수 있는 지식인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 최고 철인들 중의 한 명으로 불리는 헝가리의 보이드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유창한 말솜씨를 보여 주었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일을 보지 않고 말씨름만 해서는 시간만 낭비하겠다 싶어서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간단한 질문 하나를 하고 싶다. 내가 질문을 해도 실례가 되지 않겠는가?”
“어떤 질문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사랑이라는 용어이다. 너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사랑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그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나의 사랑을 주고 있는지 들어보겠느냐?”
그 말을 듣고는 얼굴색이 밝아지면서 말씀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인간 세계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면 정의와 양심을 가르친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바친 유일한 사랑이다.”
그리고 나서 설명을 했습니다.
“정의는 세상을 밝히는 길이고, 양심은 마음을 밝히는 길이다. 인간세계가 밝은 세상에서 밝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랑은 세상을 축복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나를 처음 만난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스승을 향한 예우를 갖추면서 저를 대했습니다. 자신의 명함을 내어놓고 명함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선생님에게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좋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정의라는 말을 여러분에게 할 때 여러분들이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당장 마음에 새겨서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의라는 말은 존재했지한 정의가 인간사회를 유지하는데 소중한 역할을 하는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생각해 본 적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은 적도 없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도 말했습니다. 정의만 있으면 법은 없어도 된다. 정의가 없는데 법은 있어서 뭐할 것입니까? 있는 일을 제대로 밝힐 수 없다면 법이 어떻게 중요합니까? 정의가 없는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일을 밝힐 수가 있습니까? 어두운 세상에서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까?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상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나약한 민족으로서 살아왔던 것은 우리 사회에 정의를 크게 일으켜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로서의 국가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서 부흥할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그만큼 활동이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위축된 활동 속에서 어떻게 부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큰 힘이 창출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수백 번의 외침을 당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외침을 당했을까요? 우리가 나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약했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만약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외침들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바로 이 점을 등한시했던 것입니다. ‘공자 왈 맹자 왈’만 읍조리면서 소중한 것들은 전부 빼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윤리(倫理)는 가르치면서도 도덕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5=□’,의 문제에서 ‘○’에 해당하는 숫자를 주지않고 답을 만들라고 하면 그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만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에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뒤에 있는 문제만 가지고 답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윤리가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덕이 없는데 어떻게 윤리가 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위선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데 어떻게 도덕이 설 수가 있으며, 도덕이 없는데 어떻게 윤리가 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종종 그 자식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떤 순간적인 충동이, 어떤 잘못된 생각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회에 올바른 가르침이 실종됐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모를 때 어떤 생각도 할 수 있고, 어떤 오해도 할 수 있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사고입니다.
중요한 점은 정의가 상실되고 사랑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 사고가 의식을 가지고 있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점 이외에는 동물의 사고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 점을 명심하고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이 땅에는 희망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서 정의의 역할에 대해서 들었으니까 정의가 인간사회에서 얼마나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정의의 실종으로 인하여 우리는 너무나 오랜 동안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또 온갖 거짓에 속아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문제 속에 문제와 해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를 모르면 문제도 모르고 해답도 모르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은 존재하고 있는 뜻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고 변화하게 되며 또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치를 개혁하고, 사법부를 개혁하고, 행정부를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한다고 하더라도 정의가 없다면 새로운 부패와 부정과 새로운 탐관오리가 만들어져서 사기와 거짓에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어둠 속에 빠져 있는 사회는 정의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상(象)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고 공을 들여도 밭에서 좋은 열매를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땅에 물과 양분을 적절하게 주고 적기에 김을 매어주는 등 주변의 환경을 좋게 만들어 주면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나 의식행사를 통해서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이 땅에 다시 정의의 물결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일을 바르게 이해해서 바르게 알 때 우리는 중요한 문제들을 볼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해답은 문제로부터 비롯됩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뜻 하나로 인류는 세상에 존재해 왔습니다.
좋은 가르침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문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문제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게 하는 깨달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거짓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만 어두운 세상에서 거짓으로부터 벗어나서 산다는 일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말에 대해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에 관하여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있었다면 설명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를 다시 확인을 하고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질문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질문을 많이 만들어서 이 자리에서 질문을 해주는 것이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 회심: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깨달음을 얻기 전에 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정의(正義)를 배워야 합니다. 존재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이 나를 속여 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하고 있는 일을 알아야 그 일을 축복할 수 있지 그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일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을 얻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큰 공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축복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한마디만 제대로 들어도 큰 공부가 된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답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진리가 어떤 것이냐?’ ‘정의가 뭐 하는 것이냐?’ ‘철학이 무어냐?’ ‘철학에 대한 정의를 내려라’라고 요구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말합니다. ‘사랑은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므로 해서 우리 자신이 축복받게 된다. 여러분들이 땅을 축복하면 땅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열매를 줍니다. 땅이 우리에게 축복을 줍니다.
좋은 마음을 갖는 것은 자신을 좋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일은 짝사랑일 뿐입니다. 어떤 상대를 축복하려고 하다가 자신이 그 일에 속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그 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는 그 일에 속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일을 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 질문? 충분한 이해가 안 간다면 또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질문해도 되고.
최부군: 아까 ‘인간이 모를 때 어떠한 나쁜 행동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사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사고라는 것은 어떤 판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 혹은 사고의 기준이 잘못되어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판단이 잘못되면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계속 들으면 그 거짓에 중독이 되어 그것이 진리처럼 혹은 진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항상 오판을 하게 됩니다.
요즘 항간에 귀신 천국이다라는 말이 자주 들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귀신이 세상에 많다는 말입니다. 그 귀신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요? 종교를 믿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죽어도 윤회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생이나 극락에 이르지 못하면 윤회가 됩니다. 씨앗이 건강할 때 뿌려야 좋은 싹이 납니다. 윤회가 되지 않아서 모든 기운이 빠진 상태의 씨앗은 뿌려졌을 때 제대로 싹을 틔우기 어렵습니다. 결국, 잘못된 가르침이 사람들의 사후 세계를 잘못되게 만들었고, 그러므로 해서 그들은 엄청난 영적 손실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해답은 바로 문제 속에 있습니다. 있는 일을 보면 그 속에는 모든 새로운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고,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 또한 그 속에 있습니다.
제가 여행 중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데 하나도 막히지 않는 것은 문제 속에 해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나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사람들이 문제를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계속해 주기 바랍니다.
정회심 : 지혜랑 지식에 대해서 구분을 좀 해 주세요.
지혜는 자신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시각을 말하는 것이고, 지식은 남으로부터 들어서 자신 속에 쌓은 것을 말합니다. 지혜와 지식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잘못된 지식들이 많습니다. 지혜는 잘못을 알아보고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줍니다.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인재는 양성되는 것이지만 천재는 자신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인재를 모아도 천재의 능력을 따라갈 수 없다.’ 천재는 지혜를 가지고 있고 인재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없다면 그 지식은 인간사회에서 크게 기여할 수 없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구분은 이러한 측면으로 이해를 하면 큰 오차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 질문 해주세요.
이한연 :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사랑을 주장하고 불교계통은 자비를 주장하고 유교에서는 도덕을 주장하는 등 다들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정의에 속하는 문제를 많이 주장을 하고는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역사 동안 정의가 있는 사회를 원해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여기 몇십 명 모아 가지고 사랑과 정의를 주장하고 가르치고 계신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 될지 참 판단하기가 뭐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도덕이 있는 사회, 사랑이 있는 사회, 정의가 있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질문에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개신교나 천주교에서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사랑에 대한 참된 이해를 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먼저 확인해야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축복이 될 만한 가르침이 그 속에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들의 가르침 속에 인간세계를 축복할 수 있는 가르침이 없다면 그들의 행위는 위선입니다. 거짓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자비를 가르친다고 합니다만 자비에 대한 정의가 무엇입니까? 자비에 대한 정의는 나쁜 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무지한 자를 깨우쳐서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가르침이 불교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내가 하고 있는 이 운동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도덕을 구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그들이 도덕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에 문제만 만들 뿐입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한 사람을 깨우쳐 놓으면 그 사람은 또다른 사람을 깨우칩니다. 있는 일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진정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길입니다. 모든 길흉화복의 길은 존재하고 있는 일 속에 있습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결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질문 더 있어? 없어? 없으면 그만하고.
-끝-